신라 57대 여왕은 평양기생?
‘신라 57대왕은 여왕 차릉파(車綾波)이며 기생출신,
1936년 6월29일자 부산일보 기사를 보면 신라왕관(서봉총 왕관)을 쓴 여인이 등장한다. 기사 제목은 ‘금관의 파문,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玩弄)물로’.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은 35년 9월10일 일어났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이른바 제1회 고적애호일을 맞아 경성박물관 소장품인 서봉총 금관을 비롯, 허리띠·장식·목걸이·귀고리 등 황금유물들을 대여, 특별전을 벌였다. 평양박물관장은 고이즈미라는 자였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이 자는 기관장들이 모여 술자리를 질펀하게 뒤풀이를 벌이던 기생집으로 유물들을 몽땅 가져왔다. 그런 뒤 용서못할 짓을 저질렀다. 차릉파라는 기생에게 서봉총 금관은 물론 모든 금제유물들을 씌우고 끼워 술판을 벌인 것이다. 저 어색한 기생의 표정을 보라.
그 자들은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마음껏 농락하고 놀았으리라. ‘신라여왕’을 끼고 술을 마시니 얼마나 좋으냐는 듯…. 신라와 그 찬란한 신라금관은 이렇게 능멸당했다. 물론 고이즈미라는 자는 이 사건으로 옷을 벗었다고 한다. 일제하 우리 문화재의 수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에 앞선 1927년 11월10일, 경주박물관에서 금관을 제외한 금관총 출토유물들이 싹쓸이 도난당했다. 경찰은 “천수백년 전에 만든 금세공품은 아무리 녹여도 지금의 금과 다르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범인들을 유인했다. 범인은 6개월 뒤에야 경찰서 관사 앞에 유물들을 갖다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심리전의 결과로 유물은 찾았으나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다.
해방이 되었어도 금관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경복궁 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던 금관 2점(금령총·서봉총)을 슬쩍 해치웠다. 그러나 그 금관들은 모조품이었다. 10년 뒤인 1956년엔 금관총 금관이 사라졌다. 범인은 대낮에 관람객을 가장하여 진열실에 들어왔다가 유물실에 잠복, 밤중에 ‘쓱싹’ 한 것이었다. 그것도 ‘금관’만 싸들고….
그러나 그 또한 복제품이었다. 범인은 ‘가짜금관’이라는 신문보도를 보았는지 인근 모래사장에 ‘모조금관’을 파묻고 말았다. 이 모든 사례가 그만큼 금관의 가치가 크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긴 금관을 비롯하여 신라의 금제유물들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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