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빡™ 2006. 5. 24. 18:10
나그네의 혼을 담고 피어난 '여로'
[오마이뉴스 김민수 기자]
 
ⓒ2005 김민수
나는 제주의 다랑쉬오름 정상 부근에 피어있는 여로라는 이름을 가진 꽃입니다. 그 곳에서 그 누군가가 걸어갔던 길을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 걷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지금은 뿌리를 땅에 내리고 있어서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하지만 먼 옛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 이 곳까지 왔었답니다. 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려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의 길이라고 했던가요? 나그네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이들이 하나 둘 이어지면서 작은 오솔길도 만들어졌겠지요. 그리고 그 오솔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하나 둘 이어지면서 그 길은 점점 넓어지고 마침내 신작로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그네. 그저 길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서 그렁저렁 지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그네 아닌 사람은 없겠지요. 아주 먼 옛날 중국에 '여로'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 때문인지 그는 어디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가벼운 봇짐을 하나 달랑 둘러메고는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풀섶이나 움막이나 처마 밑에서 쉬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쉬곤 했습니다. 나그네길을 걸어가다 보니 당연 짐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그렇게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 보니 영락없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지처럼 보였습니다.
ⓒ2005 김민수
그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것을 본만큼 느낀 것도 많았고, 그에 따라 속도 깊어졌습니다. 그 속내가 깊어지니 그의 눈도 반짝반짝 빛났지만 사람들은 그의 눈보다도 그의 행색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인생의 희노애락의 저 밑바닥까지 다 보았다고 할 정도로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늘 그 마음 속에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었는데 '죽음'이후의 삶이었습니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살아 생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그 길은 어떤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여로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걷고 또 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 중에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했습니다. 평생을 걸어다니며 살아왔지만 점점 다리에서는 힘이 빠져나가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풍광이 좋은 곳에 움막이나 하나 짓고 남은 여생을 살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 생각도 잠시, 단 사흘을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걷고 또 배를 타고 어느 날 우도가 지척에 보이는 종달리라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오름과 바다와 섬 속의 섬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그 곳에서 그는 그가 그토록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가 수 십 년 걸어온 길이 참으로 길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너무도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짧게만 느껴지는 순간들이 영원의 순간으로 변하는 사건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삶과 죽음,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하나라는 것, 그것도 뗄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니 편안해 졌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돌아보니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길이었고, 자신처럼 나그네 삶을 살았어도, 아옹다옹 세상사에 치며 살았어도 모두가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죽음, 그것은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니 그 동안 어두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죽음이라는 것을 친구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5 김민수
종달리 바다를 돌아 다랑쉬오름을 향했습니다. 어쩌면 육신의 힘을 빌어 걸어가는 여행길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길, 가파른 오름은 쉽게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는 그 곳을 걸어갔던 이들이 많지 않아 억새를 헤치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여로는 다랑쉬오름의 북쪽으로 길을 만들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힘에 겨울 때마다 쉬고 또 쉬었습니다. '지금은 길이 아니지만 그 누군가 내가 걸었던 그 길을 걷는다면 이 길도 길이 될 거야!'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 펼쳐진 오름의 능선은 그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름 정상에서 넓게 펼쳐진 바다, 그가 득도를 했던 종달리 바다를 바라보면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이젠 그 누구도 걸어가 보지 못한 그 길, 홀로 가는 길을 걸어가는 거야! 영원이라는 시간 속으로….' 그리고 얼마 후 그 곳에 올랐던 또 다른 나그네가 그를 아끈다랑쉬오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다랑쉬오름 능선에서 동쪽에 있는 아끈다랑쉬 오름을 바라보면 양지바른 곳에 작은 무덤이 있답니다. 그리고 여로가 올라오며 쉬었던 곳마다와 여로가 이 땅의 삶을 놓았던 그 곳에 꽃망울이 무수하게 많이 달린 꽃이 고개를 쭉 내밀고 피어났답니다. 지금도 한 여름 다랑쉬오름에 가보면 여로가 걸어갔던 그 길, 다랑쉬오름의 북쪽과 정상부근에만 그 꽃이 피어있답니다. 그 꽃의 이름은 바로 '여로'라는 꽃입니다.